부귀면 세동리 신덕마을 김순용 씨

▲ 김순용 씨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귀농인 김순용(52) 씨 마음에 새겨진 물음표였다. 충북 청원에서 부유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김순용(52) 씨는 삶의 근원적 물음에 답을 얻고자 20대 후반에 가톨릭 수녀원에 들어갔다.

큰 어려움 없이 자란 그녀는 수녀생활을 하면서 가난한 자들의 벗이 되었고, 그들의 모습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물음에 한줄기 빛을 보게 됐다. 그 빛에 인도되어 지내던 그녀에게 어머니의 부음이 들려왔다.

낮은 데로 임하던 마음이었건만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에도 마음을 쓸 수가 없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그녀는 결국 수녀원을 나왔다.
 
시댁에서 농사 몸에 익혀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삼십을 훌쩍 넘긴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결혼 독촉에 시달려야만 했다. 결국 도피하다시피 친구가 살고 있는 제주도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직장을 다녔고, 결혼할 남자가 있다는 폭탄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제주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제주도 생활이 좀 더 이어지다, 시부모님께서 함께 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 오셨다. 별 거리낌 없이 김제에 계시는 시댁으로 들어갔다.

시댁은 포도농사를 짓고 있었다. 자연스레 시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게 됐다.
일은 힘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친정에서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농사를 해 본 그녀였기 때문이다.

늦은 공부 통해 많은 것 얻어
그러다 익산으로 분가를 하면서 그녀에게 새로운 삶이 다가왔다. 늦은 나이였지만 다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내친김에 대학원에 진학해 국어교육학을 공부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학업을 이어가는 게 쉽지가 않았다. 코피를 쏟아내기가 다반사였다.

그러한 공부 과정에서 그녀는 많은 것을 건져 올렸다.
우선 아이들이 올바르게 성장했다. 가사와 공부를 병행하며 코피를 쏟는 자신이, 다른 엄마들 보기에는 낙제점이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집안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책상 앞에 앉는 자신을 보며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레 책 읽기 좋아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박봉으로 출판사에 다니는 남편 덕에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았고, 일상의 모든 것에 검소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하는 힘이 길러졌고, 검소함이 몸에 배었다.
그녀 자신에게는 도시의 소비적 삶에 대한 비판의식과 더불어 근원으로서의 농촌이 가슴에 새겨졌다.
 
마을간사 제도 통해 진안 정착 꿈꿔
그러던 어느 날 진안군에 마을간사 제도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지체 없이 달려왔다. 2주간의 기다림을 끝으로 다행히 자리가 생겼다. 조일전쟁 때 웅치전투로 유명한 부귀면 세동리 신덕마을에 작은 짐을 푼 것이다.
이른 아침 새소리에 잠이 깨 산책을 나섰다가 밭일을 하는 마을 분들을 돕기도 하며 농촌의 모습에 차츰차츰 눈이 떠지고 있는 그녀다.

농촌에 들어온 지 어느덧 8개월. 아직 자신의 독립적인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그녀는 신덕마을 방문자센터에서 생활하고 있다. 공적인 공간이기에 불편한 점이 없진 않지만, 이런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다는 게 그녀로서는 크나큰 축복으로 여겨졌다.

앞으로 작으나마 땅을 구입해 소박하게 집 짓고, 별체를 하나 더 지어 민박을 해보고 싶다는 그녀. 돈벌이를 위한 공간이기 보다는 그저 찾아오는 이에게 따뜻한 밥 대접하는 포근한 만남의 장이 되고 싶은 것이다. 텃밭에서 직접 기른 농산물로 소박한 밥상을 차리고 싶은 그녀는, 그 밥상 건너에 남편이 앉아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익산에 살고 있는 남편과 일주일 간격으로 만나지만 조만간 이곳 진안에서 함께 소박한 밥상 앞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할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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