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준연의 사는 이야기
임준연 주천면 무릉리

얼마 전 영화<차우>를 감상했다. 괴수영화라기엔 우리에게 너무 친근한 멧돼지가 주인공인 영화다. 인간의 이기가 결국 멧돼지의 서식지를 줄이고 무자비한 야생동물의 포획과 사냥의 야만이 키운 괴물. 한적한 시골 야산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범인은 바로 야수 멧돼지다. 시골마을에서 일어나는 인간 군상의 코믹한 모습들에 실소가 나고 폼 잡고 나타난 포수의 인간다운 면모로 웃기는 것은 좋았다. 결국 달랑 한 마리의 큰 산돼지를 잡고 마을의 평화를 이뤘다는 해피한 결말은 조금 경망스러웠다.

이후 퇴근하는 길에 도로 위를 방황하는 멧돼지 한 마리를 봤다. 그렇게 근거리에서 실제 멧돼지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직접 목격한 것이 처음일 것이다. 혹시 치일까봐(또는 칠까봐) 속도를 줄였다. 차를 인지한 그 녀석은 도로 갓길로 몸을 움직이더니 절벽 경사면을 타고 오르지 못해 머리를 주억거렸다.

만약 차 안에 있지 않고 만났다면 나는 공포에 떨며 그 녀석을 피해 도망갈 방법을 찾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시동이 걸려 언제라도 속도를 높여 움직일 수 있다는 안도감이 오히려 그 놈의 안위를 걱정할 만큼의 여유를 만든 것일까.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택시가 속도를 현저히 줄이는 모습을 사이드미러로 확인하고 달리던 중 몇 마리의 세퍼드가 그 쪽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목격했다.

추격은 아니었다. 매우 느릿하게 길을 걷고 있었는데 도중 샛길이 없어서 10분 내에 만날 것이 충분히 예상이 되었다. 내 머릿속엔 사냥본능을 가지고 있는 개들과 멧돼지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한 궁금함이 얼마 전 본 영화와 맞물려 머릿 속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멧돼지는 위협적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제거의 대상인가. 다 죽이고 나면 우린 안전해 질까. 그럼, 우리에게 공포를 주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살아야 할까. 그럼 현재 살아 있지 못한 동물들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리워하진 않던가? 그저 박제된 호랑이, 곰의 모습을 보며 향수에 젖는 것뿐인가. 호랑이가 살았다면 이처럼 멧돼지가 세를 떨치진 않았을텐데.

호랑이, 곰, 여우, 늑대, 그리고 부엉이, 올빼미, 매 등의 상위포식자들의 존재를 확인하기 힘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멸종되거나 멸종의 위협에 도움(?)을 준 것은 인간의 존재이다.

존재 하나만으로 위협적인 인간은 서식지를 무한대로 확장하며 몇 천 년을 이어온 '공존의 지구'를 바꾸었다. 과거 일정지역에서 일정수의 동물을 생존을 위해 사냥하던 습성은 총이 발명된 근래에 바뀌었다. 그들의 가죽을 자신의 집에 걸어 놓거나 장기의 일부를 또는 뼈를 얻어서 공예품으로 만들기 위해, 몸에 좋다는 소문에 보신을 위해 잡는 동물은 그저 금전적 가치로 전락하고, 눈에 띄거나 소문난 동물들은 씨가 말라버리고 말았다.

인간들은 산을 개간하여 그들 서식지를 침해하고 먹이를 찾아 내려온 그들에게 그네 터전을 빼앗은 변명대신 총부리를 들이대거나 올무로 목이나 발목을 죈다. 토끼, 너구리, 고라니, 멧돼지 등이 덫에 걸리거나 포수의 총탄에 죽음을 맞는다.

한쪽에서는 야생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목숨을 걸고 하고 한쪽에서는 유해조수의 사냥을 허가한다. '야생동물'과 '유해조수'의 거리는 멀지 않다. 같은 종을 규정하는 인간들의 '놀음'일 뿐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짐승들, 이야기책에 등장하고 동물원에서 만날 수 있는, 아이들에게 친근하기만 한 그네들을 어른들은 못 잡아서 안달이다. 같이 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노력보다 총칼로 잡는 것이 쉽고 빠르기 때문에 선택한다는 것은 야만과 폭력의 합리화일 뿐이다.

상위포식자를 없애 놓고 개채수가 늘어간다고 그들조차 없앤다면 차츰 하위개체의 득세로 이어지고 결국 나중에는 동물 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그럼 인간도 그 곳에선 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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